ESG 정부지원, 쉬운 것 말고 어려운 것도 좀 해달라고 해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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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정부지원

쉬운 것 말고, 어려운 것도 좀 하라고 해라!!

 

 

반쪽 짜리 대책

 

지난 정부의 ESG 대응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정부가 지난해 말에 발표한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_이하 방안>도 (좋게 봐서) 반쪽 짜리 대책이다. 지난 정부나 이번 정부나 ESG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ESG를 '투자나 수출 중심'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장 닥칠 현실적 이슈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투자나 수출을 넘어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속가능경영체계를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마스터 플랜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  <방안>도 그 목적이 '기업 경쟁력 제고와 지속가능 경제 구축' 이라고 써있는데, ESG 투자나 평가에 대한 대응만 보일 뿐 지속가능 경제 구축을 위한 '지속가능성' 자체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번 정부만 그런 것도 아니지만, 국정운영의 모든 것을 대통령 5년 임기에 맞추는 '단기 대응 중심'의 우리나라 현실에 한 숨이 저절로 나온다.

 



  

안산으로...

 

답답한 마음에 이른 퇴근을 하고 4호선을 탔다. 

 

발표자료엔 <관계부처합동>이라고 써 있지만, 실제로는 <기획재정부>에서 내놓은 자료다. 우리나라 정부부처 중 가장 힘이 세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실세부처'에서 내놓은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을 현장은 어떻게 받아드릴지 궁금했다. 

 

안산역을 지나 신길온천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시화공단으로 향했다. 시화공단에 있는 금속부품업체 (가명) <K정밀기공>은 밤 8시가 다 되었는데도 환하게 불을 켜고 금속부품을 가공하는 정밀절삭기계들을 열심히 가동하고 있었다.  

 

<K정밀기공>의 대표는 대학교 동아리 선배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 계열사에 엔지니어로 취업했고 10년을 꼬박 채운 후 아버님이 운영하던 회사에 부장으로 입사했다. 7년 전부터 대표직을 맡고 있다.

 

SNS를 통해 가끔 연락을 주고 받던 선배는 내가 ESG 관련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3만5천원짜리 회정식을 사준 후 나를 회사의 자문직에 앉혔다. 하지만 바쁨을 핑계 대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 일이 별로 없어, 늘 미안하게 생각하던 차에 새해 인사 겸 공장을 찾아갔다.

 

"아이고, 자문님이 여기까지 직접 행차를 하시고, 저녁은 잡쉈수?"

 

공장내부 2층 사무실에서 K대표를 만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일이 많으신가봐요. 새해 첫 주부터 야간작업 하시고?"

 

"엉... 독일 쪽 주문이 좀 늘었어, 전기 트럭 생산이 늘어나니까.. 아무래도 우리 물건을 많이 찼네... 좋지 뭐..."

 

<K정밀기공>은 자동차와 가전제품, 전동 공구에 사용하는 소형 모터와 발전기의 부품을 만드는 회사다. 국내 기업에도 납품을 하지만 80% 이상 독일, 스웨덴 등 유럽회사에 납품한다. 직원은 40명 정도이고 매출은 200억이 조금 넘는다. 

 

K대표가 직접 타준 믹스커피를 마시며 소소한 얘기를 나눈 후 나는 출력해 간 <방안>을 꺼냈다. 성격이 꼼꼼하고 계산이 분명해서 천생 이과생인 K대표는 <방안>을 두 번 읽었다. 중간 중간 밑줄도 긋고 메모도 했다. 그리고... 맘에 들지 않는다는 특유의 표정,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쭉 내밀었다.

 

"음... 음... 이거 만든 애들이 현장을 안와봤구만, 현장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고 짜집기만 한거네...이거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되네, 수출하는 중소기업들이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고 쓴 거구만.."

 

<K정밀기공>은 기계 엔지니어였던 K대표의 아버님이 1980년대 초에 설립한 회사다. K대표의 아버님은 1970년대 국내 자동차회사에 입사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독립해 회사를 차렸고, IMF때 납품하던 국내자동차회사가 망하는 바람(정확히는 M&A)에 공장 문을 닫고, 전 재산을 날린 후, 다시는 국내 기업에게 납품하지 않겠다고 다짐 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지인이 일하던 독일 회사에서 1년 반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공장문을 열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아버지 회사에 입사하기 전 2년간 독일 연수를 다녀온 K대표는 회사 얘기를 할때마다 독일 얘기를 한다. 요즘도 K대표는 유럽 출장을 자주 간다. 

 

"5년전인가.. 그래, 2017년 맞다. B(독일)사에서 현장 실사를 왔어, 한국 지사 직원과 독일 본사 직원이 같이 왔더라고, 실사는 심심하면 나오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때 얘네들이 뭐라고 했냐면.. '공장 지붕에다가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할 수 있느냐' 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갑자기 왠 태양광이냐고 했지'..., 그랬더니... 독일 정부에서 외국 부품업체들의 탄소배출,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규제할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만.... 우리 공장 지붕에 태양광 설치해봐야 공장에서 사용하는 전기 1/10도 감당 못할거라고 했더니... '비율도 중요하지만, 노력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니까, 설치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한국 지사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해 줄 수 있고, 한국 납품회사들이 한꺼번에 하게되면 더 싸게 설치할 수 도 있다고.. 그런 얘기를 했어, 그리고 관련해서 미팅도 하고 우리 시설부장이 독일 현지 협력업체들 답사도 다녀오고 했거든... 그래서 물류창고 지붕에 태양광 올렸잖아, 여기 공장은 너무 좁아서 효율이 안나오더라고.... "

 

K대표는 B사외에도 독일과 스웨덴의 M사, E사, G사, V사가 한국의 부품업체들과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M(독일)사가 2020년, 코로나가 터지자 마자 코로나 대응 지침을 메일로 보내더라고, 우리는 솔직히 M사의 2차 협력업체거든, 아무튼, 우선은 영어로 보내고 2주에 후에 한국말로도 보내고... 몇 장되지는 않았는데, 관리 받고 있다는 느낌.. 이런게 확 드는 거지... 옆에 (국내) H사 2차 협력업체가 있는데 거기는 H사에서 신경도 안써... 아마 H사는 자기들이 납품 받고 있는지도 모를거야.."

 

내가 <K정밀기공>의 ESG 자문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 동안 할 일이 별로 없었던 이유는 <K정밀기공>의 지속가능경영이 내가 자문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K정밀기공>은 지난 10여년 동안 독일, 스웨덴 기업들이 요구하는, 즉 EU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속가능경영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 유럽기업들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잔소리 말고 같이 해결해야지

 

"다른 부분은 잘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안되지.. "

 

K대표는 <방안> 중  '중소, 중견기업의 ESG 경영지원 강화'  부분을 가리켰다. 

 

"내가 회사를 하면서 제일 답답한게 뭔지알아? 우리나라 정부, 지자체, (중소기업)협회, (납품 받는)대기업, 은행 들이 서로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지, 중앙 정부는 ESG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지자체는 아무것도 몰라, 협회에서 교육 오라고 해서 우리 부장이랑 팀장 보냈는데 다녀와서 하는 말이 '십년 전 얘기하고 있던데요' 라고 하는 거야, 얼마 전에 은행에 가서 ESG 대출 좀 알아보라고 했더니, 은행 대출 직원이 그런게 있냐고 되묻더래..."

 

1층 공장에서 알람소리가 들렸다. K대표는 벌떡 일어나더니 인터폰을 집어들고 작업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벌써 9시였다. K대표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는 것을 확인한 후 공장 문을 직접 닫았다. K대표의 차를 얻어타고 전철역 인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K대표는 운전하는 동안 중소기업 컨설팅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유박사, 유박사도 잘 알겠지만...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상황을 잘 모르거든, 진짜 모르거든, 나도 대기업 다닐때는 잘 몰랐다고.... 어쨌거나,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대기업 갑질은 여전하고... 우리 아버지도 IMF때 K자동차한테 어음 왕창 물렸다가 부도난거 알지? 어음만 아니라 뇌물에다가 가짜 납품에다가.. 암튼 그때 생각하면.. 진짜... 아주...아주... 내가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어요...."

 

나는 잠자코 들었다. 안산의 밤 공기는 공단에서 내뿜는 연기로 탁했다.

 

"그런데, 협회랑 공단에서 컨설팅 받으라고 공문이 와요. 그 컨설턴트들이 대부분 누군가 하면 공기업, 대기업 부장 출신들이야.. 이 사람들이 퇴직 후에 경영지도사 교육 받고 오는거지... 그런데 웃긴게, 그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우리한테 갑질했던 그 사람들이란 말이지... 웃기지...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컨설팅을 받으라고 하는 건지... 와서 컨설팅이 아니라 잔소리를 하다가요. 혁신이 어떻고 글로벌 트렌드가 어떻고.... 밥은 꼭 챙겨먹고 가지... ㅎㅎㅎ"

 

K대표는 정부, 지자체, 공단, 협회 등에서 제공하는 교육과 컨설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제대로된 교육이나 컨설팅은 당연히 필요하지... 그런데, 대부분 자기들 실적 채우기에 동원되는 느낌이야... 작년하고 재작년에 ESG 바람이 불어서 여기 공단이랑 협회에서 ESG 교육을 많이 했거든, 그런데 다들 다녀오고 하는 말이 '교양 수업'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하더라고, 우리 재무담당 상무도 공단에서 하도 오라고 해서 한 번 갔는데, 여기 H대학 교수가 나와서 자기 자랑만 하고 신문기사 스크랩해서 보여주고 끝이라고 하더래... 그 바쁜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뭐하는지 모르겠어..."

 

"그럼, 어떻게 하면 진짜 중소기업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카페에 앉자마자 질문했다.

 

"내 생각은 말이지, 너무 많은 곳에서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같은 중소부품기업들이야 제일 중요한 곳이 납품하는 대기업인데, 대기업에서 계약서에 ESG 지침 깔끔하게 잘 넣어주고,  ESG 잘 할 수 있도록 납품단가에 반영해 주면 그걸로 끝이지, 독일, 유럽 애들 그러고 있잖아, 뭐가 더 필요해..., 정부는 자질구레한 것 하지말고 인프라 잘 만들어 주면 돼... 지금 우리 회사가 베트남에 공장 세울 계획을 하고 있는 중인데, 왜 그런지 알아? 정부가 RE100에 관심없잖아...  (독일)B사가 우리보고 RE100 언제까지 할거냐고 자꾸 물어봐..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가 RE100 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자기들이 베트남에다가 RE100 할 수 있는 단지를 하나 만들 생각인데, 들어올지 판단해 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난 9월에 베트남 갔다 왔잖아... 벌써 태양광 발전단지를 쫙 깔아놨더라고....그걸 보고 퍼뜩드는 생각이 '이러다가 독일에 납품하는 부품업체들 전부 여기로 오는 거 아냐' ...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등골이 오싹하더라고..."

 

"선배님 회사는 그동안 독일 기업이랑 거래를 계속 했으니까 이 정도로 잘 하시는 거구요. 그렇지 않은 기업들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중소기업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지.... 우리회사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야... <B사>, <M사>, <V사> 애네들이 잘해서 우리가 잘 따라한 것 뿐이야,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ESG 잘 모르고 잘 못하는 이유는 납품받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ESG 잘 모르고 잘 못해서 그런거야... 중소기업들은 납품받는 대기업이 잘하면 다 따라가게 되어있어... 지금 상황이 말이야... 한쪽에서는 납품 단가 후려치고 갑질하면서 한쪽에서 ESG 하자고 손 내밀고 이런 거거든... 이런 상황인데 정부가 아무리 이런 <방안> 발표하고 나서봐야 ESG가 되겠냐고..., 갑질과 ESG가 공존할 수 있는거야 그게 가능해? 혹시, 정부랑 대기업 사람 만나거든 잘 전해주라, 쉬운 것만 하지말고 어려운 것도 좀 하라고..."

 

밤 10시 30분이 지났다. 선배는 전철역까지 태워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ESG, 내가 독일 애들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두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하나는 조금만 있으면 이게 '기본'이 되겠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단기적으로 땜빵 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영 체질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 그래서, 우리 회사도 여러가지 고민과 계획을 세우고 있거든..., 내가 초안을 보내줄께..  1월 말에 우리 회사 임원, 팀장들이랑 워크숍 한 번 하자고... 알았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 생각은 복잡했지만 길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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